오래되고도 새로운 명주, 허호 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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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허씨비단 댓글 0건 조회 88회 작성일 19-11-26 15:07본문
5대째 집안 대대로 명주 길쌈을 해온 허씨비단직물 허호 대표
| 집집마다 베틀이 하나씩 있던 시절, 명주길쌈은 농가의 가욋벌이였다. 언제부터인가 명주가 합성섬유에 밀려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허호 대표는 명주를 재발견해 수의로만 쓰이던 명주를 문화로 승화시켰다. 허 대표가 만드는 행복한 실타래를 따라가 본다.
5대째 집안 대대로 명주 길쌈을 하다
“우리나라에서는 마지막 효도로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명주로 만든 수의(壽衣)를 해드렸습니다. 왜 명주 수의가 마지막 효도라 불렸는지 궁금하지 않으세요? 뽕나무에서 시작하는 명주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드리겠습니다.”
허씨비단직물 허호 대표는 10여 명의 미국 체험객을 건물 별관 1층의 ‘명주 길쌈방’으로 안내했다. 이들은 한국으로 직물 여행(Textile Tour)을 온 사람들이다. 허 대표가 명주업을 하면서 꾸준히 모아둔 실을 만드는 물레나 천을 짜는 베틀 등 각종 도구를 전시한 곳이다. 명주 제작 기법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직접 체험을 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허 대표가 정성 들여 만든 이 길쌈방에는 많은 사연이 깃들어 있다.
체험객들에게 명주 이야기를 풀어놓는 허호 대표
허호 대표의 설명을 진지하게 듣는 체험객들
낙동강 원류가 시작되는 경북 상주는 예로부터 광활하고 비옥한 토지 때문에 물자가 풍부했다. 영남 제일의 곡창지대로 경주와 함께 경상도의 이름을 이루는 곳으로 쌀과 누에고치, 곶감이 유명하여 ‘삼백(三白)’의 고장이라 불렸고, 신라시대 때부터 양잠과 함께 대표적인 명주 산지로 각광받았다. 현재 상주시 함창읍은 국내 최대 규모로 전통 방식의 명주를 생산하고 있다. 오일장이 설 때면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명주전(명주를 파는 가게들이 모인 골목)이 형성되는 곳이기도 하다.
함창에서 생산하는 ‘함창명주’는 전국으로 유통돼 우리나라 전통 명주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 중심에 집안 가업을 대대로 이어받아 5대째 명주 짜기에 일념해온 허호 대표와 그와 함께 4대째 같은 일을 해온 민숙희 여사가 있다. 명주 덕분에 부부는 평생의 연을 맺었다. 부부의 고향은 함창읍 교촌리로 동네 사람들은 대부분 명주 짜기를 업으로 삼고 있었다.
“온 마을이 조상대대로 명주를 짰어요. 처가도, 저희 본가도 오랫동안 명주 짜기를 해와 자연스럽게 이 일을 업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고치 삶는 냄새를 맡으며 자랐고, 친구들과 번데기를 먹거나 빈 물레를 신나게 돌리며 놀던 추억이 생생합니다.”
허호 대표는 놀거리가 없던 어릴 때 친구들과 삶은 고치에서 실마리를 찾으며 놀았다.
물레의 기계화가 맺어준 부부의 연
함창은 넓은 평야와 기후, 토질이 뽕나무 재배에 적합해 다른 지역보다 명주 산업이 발전하기 좋은 환경을 갖췄다. 특히 한마을에 100가구 이상이 명주를 생산하고 있어 기술력도 다른 지역보다 앞섰다.
“자전거 바퀴로 물레를 만든 것은 아마 함창이 처음이었을 것입니다. 일반 물레보다 자전거 물레가 회전이 더 빨랐고, 이는 생산력을 높이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베틀도 기계화되면서 더 많은 명주를 빠른 시간에 짤 수 있게 되었고, 여자의 일로만 생각했던 가내수공업에 남자도 유입되었습니다. 이 기계화 덕분에 아내와도 만날 수 있었지요.”
1960년대 후반 마을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기계화된 물레나 베틀을 동시에 2~4대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생산력이 늘어난 데 비해 전기 공급은 원활하지 않아 기계가 멈추는 일이 많았다. 가까운 이웃들의 기계를 점검해주던 허 대표는 민 여사의 집에도 가게 되었고, 자연스레 두 사람의 만남이 이뤄졌다.
“젊은 남녀가 얼굴을 자주 보게 되면서 정이 들었어요.(웃음) 기계를 고치러 간다는 명분으로 지금의 아내를 보러 간 셈이지요.”
자전거 물레에서 실타래를 감고 있는 허호 대표
자전거 물레에서 실타래를 감고 있는 허호 대표
허 대표의 고향에서는 베틀의 형태가 점점 현대화되었다.
대형 물레에서 실타래에 실을 감고 있다.
자전거 물레에서 실타래를 감고 있는 허호 대표 허 대표의 고향에서는 베틀의 형태가 점점 현대화되었다. 대형 물레에서 실타래에 실을 감고 있다.
26세에 결혼해 본격적으로 명주를 짜기 시작한 허 대표는 처가 마당에 직기 12대를 두고 명주를 대량으로 짜기 시작했다. 각 가정에 직기가 한두 대 정도밖에 없던 때라서 허 대표의 명주 사업은 주문이 늘어났다. 공장이 24시간 돌아가는 날도 많았다. 한편 허 대표는 명주를 수의에서 일반 옷감용으로 활용처를 넓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20대 때 가업을 이어받아 일을 시작했는데, 당시 합성섬유가 물밀듯 들어오던 때여서 전통 섬유들이 사라지고 있었어요. 명주 시장도 수의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죠. 나이가 젊어서 그랬는지 ‘죽은 사람의 옷’을 만드는 것이 즐겁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업을 해볼까 고민이 깊던 시기였습니다.”
허씨비단직물 내 마련된 잠실에 있는 누에섶 모습
고민이 계속되던 어느 날, 허 대표의 눈에 쌍둥이 고치가 들어왔다. 쌍둥이 고치는 누에 두 마리가 한 고치 속에 들어가 있어 실 굵기도 불균등하고 마디가 생겨 불량으로 치부됐었다. 옥사, 옥견, 옥사명주라고 불리며 저렴한 명주로 판매되곤 했다. 허 대표는 발상의 전환을 해보기로 했다. 옥사에서 보이는 불균등한 무늬가 실패작이 아니라 또 하나의 작품처럼 보였던 것이다. 허 대표는 실용신안과 특허를 받은 감물염색기법을 곁들여 세상에 하나뿐인 옷감을 내놓았다. 명주는 다른 천으로는 흉내 낼 수 없는 색감이 표현되는 데다 독특한 질감까지 더해지니 그 자체로 특별한 느낌을 줬다. 명주에 천연염료의 다양한 색과 문양을 표현하기 위해 연구에 연구도 거듭했다.
명주에 천연염색 기법을 곁들인 허호 대표
천연염색 기법을 곁들인 명주
체험객들에게 명주 염색법을 소개하는 허호 대표
체험객들에게 명주 염색법을 소개하는 허호 대표
잘하는 일로, 행복한 삶을 설계하다
허호 대표는 수십 년 동안 명주 길쌈만 보고 달려오다 오래전 민숙희 여사와 한 약속을 떠올렸다.
“둘 다 명주 짜는 집에서 자라 명주 길쌈이 얼마나 고강도의 노력이 들어가는지 잘 압니다. 그래서 결혼할 때 우리가 돈을 모으면 명주 일 말고 다른 일을 하자고 약속을 했어요. 하지만 세상의 모든 일은 노력 없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결국 우리 부부는 우리가 잘하는 일, 잘 아는 일을 신명나게 하자고 결심했어요.”
2002년 무렵, 고향인 교촌리에서 지금의 명주공장이 있는 오동리로 터전을 옮기고 명주 문화를 널리 알리는 일을 시작했다. 누에가 만든 고치에서 실을 뽑고 베틀에서 하나의 옷감이 되기까지 과정도 많고, 그에 따른 기구도 많다. 허 대표는 명주 길쌈을 하던 집들을 찾아다니며 버려진 기구들을 모았고, 집에서 쓰레기 취급을 받던 수십 년 된 기구들도 다시 귀하게 다루었다.
“고치에서 실을 뽑는 조사기, 채, 자새, 고치솜 제거기나 실을 나르는 실패, 얼레, 틀, 그리고 명주를 짜는 베틀, 북, 명주 바디, 꾸리 만드는 틀 등 실로 많은 도구와 기구가 필요합니다. 기계화되면서 쓸모없어지거나 더 이상 길쌈을 하지 않는 집들을 찾아다니며 다양한 도구와 기구들을 모았습니다. 지금 명주 길쌈방에 있는 것들이 모두 저희 집에서 썼거나, 제가 모은 것들입니다.”
허호 대표가 수집한 명주 만드는 도구들
허호 대표가 수집한 명주 만드는 도구들
허호 대표가 수집한 명주 만드는 도구들
허호 대표가 수집한 명주 만드는 도구들
허호 대표와 민숙희 여사가 운영하는 허씨비단직물은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찾는 이가 많다. 허 대표는 명주를 생산하면서 전통 명주 짜기를 대내외에 알리는 역할에도 집중하고 있다. 무료로 운영하는 체험 프로그램은 1층 ‘명주 길쌈방’에서 시작해 3층 ‘염색 공간’에서 마무리된다. 고치에서 실을 뽑는 실 써기와 실 내리기, 베를 짜는 과정을 보여주고, 체험객이 직접 베틀에 앉아 길쌈할 수 있도록 한다. 그 뒤 방문객은 허 대표가 직접 설계하고 만든 잠실 박물관에서 양잠하는 방법과 양잠의 역사를 듣고, 마지막 염색 공간에서 명주로 염색하는 것까지 체험할 수 있다.
“제게 명주는 사양산업이 아니라 제 인생을 보석처럼 만들어준 희망입니다. 예전에는 물량을 맞추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면 이제는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명주의 역사와 제 경험담을 들려주는 삶이 즐겁습니다. 또한 아들이 제 뒤를 이어 명주 전통을 이어가겠다고 하니 제 미래가 더욱 설렙니다.”
체험객들에게 베틀에서 옷감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소개하는 허호 대표
잠실 박물관에서 누에가 고치 짓는 과정을 설명하는 허호 대표
외국인 체험객들에게 다양한 직물을 소개하는 허호 대표
옷감을 말리는 건조장을 위에서 내려다본 모습